거꾸리와 장다리
성산홍보실
0
5648
2002.01.10 00:00
저 윗지방에는 눈도 많이 내려 거리가 미끄러우니 운전 조심하라는 둥 밤새 기온이 뚝! 떨어져 혹한이 닥친다는 둥 어디 어디에 화재가 발생하여 인명피해가 어쩌구저쩌구… 들려오는 소식들이 우리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만듭니다.
이뿐인가요 얼마전에는 빈댄지 빈라덴 인지를 잡으려 초가삼간을 폭탄을 퍼부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외신도 섞여있더군요. 여하튼 안팎에서 들리는 소식들이라니 이거야 원! 심신이 피곤하고 괴로우신 분들 많지요. 이런 분들께 모든 시름 잊으시라고 우리 사는 얘기 좀 해드리겠습니다.
붙었습니다. 방금전 붙었습니다. 역시 오늘도 어김없이 붙었습니다. 위 아래층 거꾸리와 장다리의 한판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승질급한 우리의 용호상박(龍虎相搏) 두 영감님의 장기(將棋)대결이 붙었습니
다. 작년 내내 붙었습니다.
처음 시작 땐 피차 양반다리로 점잖게 앉아서 한 손을 턱에 궤고 부드럽게 시작됩니다.
-『뭐이야 이건? 고로케 야~아 고거이 좋구나』
-『둬부러 둬부러 아- 빨랑 하랑께』
그러던 것이 중반에 들어서자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우리의 거꾸리 영감님 손을 부르르 떨면서 슬금슬금 느닷없이 벌떡 성질을 돋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 시작!!
-『 빨리 두라우!!! 』
-『 에라이 18!! 니미럴놈의 장기 !! 둬부러~ 해보더라고잉~ ~ 』
-『 네레이 그케하면 되지만서두 』
급기야 게임 종반에 이르러 이젠 일어서다 못해 아예 제자리 뛰기로 사생결단의 시간
-『뭐이야??? 이거 와이라네 장 받으라우!』
이제 우리의 거꾸리 영감님 안면에는 푸루죽죽 인상을 찡그리며 요상한 주문을 외웁니다.
-『뒤어!! 뛰여!! 듀여!! 듀여! 듀여 에라이 ×같은 놈의 장기』
-『어라 가만이 보니끼네∼ 이거와이라네 환장하누만』
매사 매번 이런식 입니다. 분명 상호간 친목을 위해 두기 시작한 장기일텐데 이건 욕설 시합을 하는 건지 아예 애시당초 판을 깨자고 하는 건지...
결과요?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승부가 새해가 바뀌도록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해가 바뀌어 내년쯤에나 혹시 결말이 날는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결말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두 어르신에게 있어서 승패가 뭐이 그리 중요하겠습까?
네 살 터울의 거꾸리와 장다리 두 영감님의 만남은 장기에서 비롯됐습니다. 매년 본 재단에서 개최하는 지역노인 초청 장기대회에 앞서 시설 대표를 뽑는 예선전을 준비하면서 서로의 실력을 염탐하고 비장의 전술(?)을 갈고 닦던 중에 시작한 장기였고 서로간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가교역할을 충분히 해주었습니다.
이북 평안북도 초산에 고향을 두고 온 올해 79세된 실향민 이순관 할아버지! 이곳에서 생활하신지 5년 조금 더 되셨더군요. 아직도 또릿한 기억력을 가지고 일제시대 때 일본군에 입대하여 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전쟁에 참전 대만 싱가폴 월남을 거쳐 버마(미얀마)전선에 투입되어 당시의 전쟁무용담을 펼쳐놓으면 그 듣는 재미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그러다가 한인 위안부이야기에 이르러 입술에 거
품을 머금고 쩌렁쩌렁 호령하듯 이야기하실 때면 팔척장신(八尺長身)의 거구에서도 보일 듯 말 듯 눈시울을 적시는 우리의 할아버지신데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신 장다리영감님!
아마도 성질급하기로 두 번째라면 정말로 서러워 할 우리의 박종구 할아버지!
「∼해부러」, 「∼했당께」
전라도 사투리를 써가며 연신 종종걸음으로「나는 죽어도 한 사람만 꼬~옥 한사람만 사귄다」라는 인생의 좌우명이라도 가진 듯 오로지 장다리 영감님하고만 사귀는 올해 83살 되신 우리의 거꾸리할아버
지! 이곳생활이 어느덧 3년째 입니다. 세탁물 맡겨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사무실로 달려와 두 눈을 부릅뜨고 한 손도 부족해 양손으로 삿대질을 해가며 내 옷 찾아달라고 고래고래 알아듣지 못할 고함을 치시는 영감님! 키는 1미터 50은 더될까 말까 이 단신의 거꾸리영감님!
가끔은 두 분이 남몰래 살며시 밖에 나가 약주도 한잔씩 잡숫고 오시는 모양입니다. 입에 코라도 들이대고 냄새라도 맡는 시늉을 하면 절대로 절때로 세잔 밖에는 안마셨다고 애교(?)를 부리시는 거꾸리영감님과 장다리영감님!! 소주병을 몰래 가슴속에 숨겨 들어오다 직원들이 "이젠 건강 좀 생각하셔야지요" 라고 하면 양손을 내저으며 "절대 안먹었당께로" 하시는 거꾸리 영감님! 장기판에서의 그 혈투는 어딘가에 팽개쳐 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답게 한 길을 걸어가며 형님먼저 아우먼저 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두 분의 모습을 우리는 멀치감치에서 보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을 배우고 삶의 향기에 흠뻑 취해 흐믓해 하곤 합니다.
아! 이래서 성로원에 가면 사람이 사는 곳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곳이라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모두가 어르신들이 스스로 가꾼 성산(聖山)의 진면목입니다.
오늘도 점심때가 되면 다정한 모습으로 식당으로 향하는 두 어르신의 뒷모습을 볼 수 있겠지요. 거꾸리와 장다리영감님!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무엇보다 돈독한 우정 변치마세요.
(2001년 겨울호 회지에 실렸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